최근 전 세계 SUV 시장을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키워드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부활’인데요. 환경 규제를 맞추지 못하거나 수익성이 떨어지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곁에서 잠시 모습을 감췄던 SUV가 새로운 모습으로 속속 돌아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포드 브롱코, 지프 왜고니어, GMC 허머 등을 예로 들 수 있지요.
이번에 경험한 녀석은 오프로더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자동차입니다. 특유의 각진 디자인과 투박한 인테리어 등 ‘상남자’ 기질을 팍팍 풍기는 랜드로버 디펜더예요.
투박하지만 내구성이 높아 전 세계 험지에서 능력을 펼치던 1세대 디펜더는 지난 1948년 데뷔해 2015년까지 큰 변화 없이 70여 년간 생산됐습니다.
하지만 큰 변화가 없다는 건 좋은 쪽으로는 이미 완성도가 높다는 이야기지만, 바꿔 말하면 변화를 따르지 않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시대 변화에 맞춰 발전한 안전 및 편의 장비를 갖추지 않고 나날이 높아져 가던 환경규제를 맞추지 못한 디젤 엔진 등으로 결국 단종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랜드로버가 럭셔리 SUV로 유명하지만, 브랜드의 출발점이자 헤리티지를 가장 진하게 간직한 차는 바로 디펜더죠.
그렇게 디펜더의 단종으로 랜드로버는 자사의 아이콘을 역사 속으로 흘려보내는 듯했습니다.
랜드로버는 201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신형 디펜더를 선보이며 브랜드 헤리티지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줬습니다.
옛 정신을 계승하면서 첨단 장비 및 안전 품목을 버무려 새롭게 태어난 디펜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오프로드와 온로드에서 직접 타보면서 확인해봤어요.
겉모습은 디펜더만의 고유한 디자인을 유지하면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각진 차체와 껑충한 높이, 전후방의 짧은 오버행만 봐도 알 수 있죠.
여기에 측면 힌지 테일게이트와 외부 장착 타이어 등 디펜더 고유의 특징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앞모습은 위가 잘린 동그란 형태의 헤드램프와 주간주행등과 둥근 범퍼 등 전체적으로 귀여운 모습이에요.
특히 기존 라디에이터 그릴 자리를 차체와 같은 색으로 처리한 패널을 달고 범퍼 쪽에 그물망처럼 구멍을 뚫어 색다른 느낌을 줍니다.
옆모습은 귀여운 앞모습과 달리 기다란 차체와 큼직한 사각형 창문으로 존재감을 키웠습니다.
C필러에 차체와 색을 맞춘 널찍한 패널을 장착해 포인트를 줬어요. 뒷모습은 마치 칼로 자른 듯이 평평합니다.
테일램프도 안쪽으로 움푹 들어가 테일게이트에 장착된 타이어를 제외하곤 어디 하나 바깥으로 튀어나온 부분이 없어요.
디펜더는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춰 색다른 패키지를 제공합니다.
오프로드에 특화된 익스플로러(Explorer), 야외 활동이 많은 스타일에 어울리는 어드벤처(Adventure), 험로에서 빛을 발하는 컨트리(Country) 및 도심형 어반(Urban) 팩 등 네 가지 패키지로 나뉘며, 나만의 취향을 반영한 맞춤형 디펜더를 완성할 수 있어요.
신형 디펜더의 실내는 최신 트렌드를 적극 반영하면서도 디펜더만의 특별함을 보여줍니다. 특히 센터페시아를 가로지르는 '마그네슘 합금 크로스카 빔'은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자동차 브랜드로는 처음으로 보디 구조인 크로스카 빔 표면을 인테리어 디자인의 일부로 사용했습니다. 표면을 매끄럽게 처리해 촉감이 좋고 손잡이로 쓸 수 있죠.
디지털 계기판과 센터 디스플레이는 다른 랜드로버 모델에서 볼 수 있는 구성입니다. 다만 센터 디스플레이의 위치가 다소 낮고 크기가 크지 않아 조금 더 컸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UI 및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기존 랜드로버 차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처리 속도와 연동성을 높인 '피비 프로'와 소프트웨어 무선 업데이트 시스템인 SOTA 기술을 지원해요.
비스듬하게 누운 센터페시아에는 ‘ㄱ’자로 꺾인 변속레버와 공조 다이얼, 오프로드 주행에 필요한 조작 버튼이 있습니다.
센터 터널은 온통 수납공간으로 마련해 크고 작은 짐을 다양하게 수납할 수 있어요.
냉장 보관이 가능한 콘솔박스와 휴대전화 무선 충전 패드, 곳곳에 충전 포트도 갖췄습니다.
도어 패널은 차체 페인트와 나사가 그대로 노출된 형태를 띠고 있어 센터페시아에서 느꼈던 신선함을 이어가고 있어요.
2열 공간은 넉넉합니다. 3,022mm에 달하는 긴 휠베이스로 탑승자에게 넓고 편안한 실내 공간을 제공하죠.
2열 레그룸은 1m에 가까운 992mm의 길이를 자랑하고 분할 폴딩 기능으로 효율적인 공간 활용이 가능합니다.
2열 바닥 가운데 턱이 낮고 시트 위치가 높아 개방감도 훌륭해요. 또 천장에는 파노라마 선루프와 함께 2열 뒤쪽에 별도 유리창을 뚫었습니다.
'알파인 라이트'로 불리는 가로 형태의 유리는 산 정상을 바로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던 예전 디펜더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받았어요.
트렁크는 오염이 적은 바닥 소재를 사용해 물기가 묻은 장비도 부담 없이 넣을 수 있습니다.
적재 공간은 기본 1,075L, 2열 폴딩 시 최대 2,380L까지 늘어나요. 최대 적재량은 900kg이며 루프 하중은 300kg(정차시)으로 웬만한 캠핑 장비도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신형 디펜더는 직렬 4기통 2.0L 인제니움 디젤 엔진을 장착해 최고출력 240마력, 최대토크 43.9kg.m를 발휘합니다.
0→100㎞/h까지 가속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9.1초이며 안전제한을 건 최고속도는 188km/h예요. 8단 자동변속기와 네바퀴굴림이 기본이며 연료 효율은 복합 기준으로 9.6km/L입니다.
시승은 경기도 양평의 어느 고개에서 시작했어요. 출발에 앞서 오프로드 주행 모드로 차의 성격을 바꿨습니다.
서스펜션을 극단적으로 높이고 로우 기어로 바꿔 낮은 속도에서 토크 분배에 집중했고 전자동 지형 반응 시스템도 컴포트에서 자갈/머드/샌드/암석 등 상황에 맞게 돌렸어요.
디펜더는 거친 바위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넘어갔습니다. 높은 지상고를 바탕으로 바닥을 묵직하게 누르며 길을 정복해 나갔죠.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입니다. 덩치만 부풀린 도심형 SUV라면 엄두도 못 냈을 구간을 디펜더는 가뿐히 지나갔어요.
차체가 뒤틀리는 바윗길을 달려도 디펜더는 불안한 자세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랜드로버가 디펜더만을 위해 개발한 새로운 알루미늄 D7x 플랫폼 덕분이죠.
경량 알루미늄 모노코크 구조로 기존 프레임 방식과 비교해 강성이 3배나 높습니다. 프레임 방식보다 충격 흡수가 뛰어나기 때문에 험로 주파 때 실내로 전해지는 충격이 덜하고 한결 쾌적하게 주행할 수 있었어요.
험로를 탈출하고 본격적인 온로드 주행이 이어졌습니다. 일상 영역은 물론 정차 시에도 디젤차 특유의 소음이나 진동은 발견하기 힘들어요.
속도를 올리는 과정이 자연스럽고 안정적입니다. 랜드로버는 에어 서스펜션과 함께 적용되는 어댑티브 다이내믹스를 통해 개선된 핸들링과 승차감을 제공한다고 설명했어요.
어댑티브 다이내믹스는 초당 최대 500회까지 노면 설정이 가능한 연속 가변 댐핑을 사용해 차체 제어 및 롤링을 최소화합니다.
엔진회전수를 높이면 제법 묵직한 소리를 내며 강하게 치고 나갑니다.
다른 랜드로버나 재규어 모델에서도 사용하는 범용 엔진이지만 전혀 듣지 못했던 사운드죠.
마치 미국산 대배기량 SUV의 가속 페달을 밟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합니다.
다운사이징 터보에서 어떻게 이런 소리를 구현했는지 모르겠지만 감성을 충족시키고 온로드에서 디펜더의 매력을 더하는 요소임은 분명해요.
랜드로버 디펜더는 정통 SUV가 갖춰야 할 덕목과 최근 도심형 SUV가 갖는 트렌드를 두루 겸비했습니다.
디펜더와 함께 등산부터 캠핑이나 서핑 등 폭넓은 레저 활동을 즐길 수도 있고 반대로 도심에서는 존재감을 드러내며 여유로운 운전도 가능해요.
정통 오프로더에서 멀티 플레이어로 변신한 디펜더,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사진 오토타임즈, 랜드로버